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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은 온조왕이 백제를 세우고 위례성을 쌓았다고 전하는, 오랜 역사가 깃든 땅이다. 오늘날 하남시는 미사강변도시 개발로 도시적 풍경이 강조되는 공간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다른 역사와 사상이 대칭되는 문화지층이 숨어 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망월동 구산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품고 있고, 교산동의 광주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유학 교육의 중심이었다. 한 도시에 천주교와 유교의 유산이 나란히 자리한다.
구산성지 정문. 김지영
바다이야기오락실◇ 거북이 언덕에서 꽃핀 신앙, 구산성지
하남 망월동은 본래 '망월포'라 불리던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장마철이면 한강 수위가 높아져 본류에서 갈라진 샛강이 구산마을 안쪽까지 흘러들었다. 물길이 넓어지며 자연스레 얕은 포구가 만들어졌고, 이곳은 강을 오가던 배들이 잠시 정박하며 쉬어가던 지점으로 활용됐다. 마을 뒤에 자리한 낮은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구릉은 거북이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구산(龜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신도시 속에서 찾기 어려워졌지만, 이곳은 19세기 조선 후기 박해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은둔했던 곳이었다.
구산마을 출신의 김성우(1795~1841)는 지역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고, 서학을 접한 뒤 가족과 이웃에게 신앙을 전파해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드는 데 바다이야기게임 큰 역할을 했다. 183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Maubant) 신부가 구산에 공소를 세우며 김성우를 평신도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러나 박해의 물결은 구산도 비켜가지 않았다.
김성우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15개월의 옥살이를 견디고 1841년 한양 포도청에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 구 모바일릴게임 산으로 돌아와 안장됐고, 이후 이 마을에서는 9명의 순교자가 더 나왔다. 지금의 구산성지는 바로 이 순교자들의 묘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지다. 묘역은 건립 이래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김성우의 후손과 신자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이 자리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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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지 내 성인묘역으로 들어가는 문, 안당문. 김지영
성지 안에는 '안당문'이라 불리는 입구, 순교자의 묘역, 초봉헌실, 성당 등이 갖춰져 있다. 구산성지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오랜 시간의 울림을 주는 공간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전통 건축기법을 품은 독특한 성지 경관
구산성지는 둘레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기와를 켜켜이 쌓은 모습으로 한국적 정취가 강하다. 성지 안에 들어가 보면 성당, 묘역, 조형물 곳곳에서 기와가 주재료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성지임에도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성지 안에 자리한 성당 건물은 벽돌이나 석조로 외벽을 드러내는 다른 성당과 달리, 외벽 전체를 전통 기와로 마감했다.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외장을 기와로 두르고, 창문은 한국식 전통 창호의 형태를 본떠 제작해 성당이 성지 전체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의도한 흔적이 엿보인다. 성지 중심부의 9인 성인묘역 둘레를 감싸는 낮은 기와담장은 한국적 미감과 정갈함을 동시에 전한다.
낮은 기와담장으로 둘러싸인 성인묘역 입구. 김지영
성당 입구에는 '기왓장 봉헌'이라는 익숙하지만 어딘가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 있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이 기와에 이름을 적어 봉헌하면, 이를 성지 정문 조성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왓장 시주는 보통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천주교 성지에서 같은 방식을 도입한 것은 신앙 실천을 보다 친숙한 문화와 연결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전통식 기와로 지어진 성당. 김지영
◇전쟁 이후 신자들이 세운 작은 성당, 그리고 '이축'이라는 새로운 선택
구산마을의 신앙은 근현대에도 이어졌다. 한국전쟁 직후 신자들은 힘을 모아 1956년 벽돌 조적조 성당을 직접 건립했다. 한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 나르며 만든 벽돌로 지어진 소박한 성당은 당시 지역 공동체의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2000년대 미사강변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성당은 철거 위기에 놓였다. 인근의 구산성지는 향토유적으로 보호됐지만, 성당은 보존 대상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결국 신자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성당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방식을 선택했고, 2016년 약 200m 떨어진 자리로 성당을 해체하지 않은 채 옮기는 작업이 이뤄졌다. 조적조 건물을 원형 그대로 이전한 국내 첫 사례다. 성당의 원래 자리에서 보이던 한강 풍경과 언덕 지형은 잃었지만, 공동체가 스스로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은 한국 근대문화유산 보존 사례 중에서도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광주향교 입구. 김지영
◇하남의 또 다른 뿌리, 광주향교
구산성지에서 교산동으로 이동하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들판 너머로 조용한 전통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광주향교다. 조선시대 지방 유학 교육과 제향(祭享)의 중심이었던 관학 기관으로, 현재는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향교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지만, 170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주향교는 전국에서도 드물게 평지에 세워졌으며,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그 앞에 마주 선 동재와 서재가 있다. 뒤쪽에는 공자와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대성전이 자리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광주향교 앞 수령이 500년 된 은행나무. 김지영
향교 입구에 서 있는 수령 400~500년 된 은행나무 다섯 그루는 이곳의 상징이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 고사를 한국적 방식으로 구현한 것으로, 유학 교육의 장소라는 상징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식재된 사례가 많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 아래 학당'을 의미하던 전통이 한국에서는 은행나무로 치환돼 성균관과 지방 향교의 상징 수목으로 자리 잡았다. 광주향교에 관해 전해지는 고사에 따르면, 이 자리는 거북이 형국의 명당으로 여겨져 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향교 안팎이 노란 잎으로 물들며, 조선시대 교육과 제향이 함께 이뤄지던 공간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광주향교는 단지 옛 교육 공간이 아니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전통문화 행사, 공연 등이 열리며 지역 시민들의 문화적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향교 관련 문헌과 유물들은 하남역사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현장 답사와 박물관 관람을 함께하면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구조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산성지 내 성인묘역. 김성우 안토니오가 묻혀 있다. 김지영
◇ 하나의 도시, 겹쳐진 사상과 신앙의 흔적
두 문화유산을 따라가다 보면, 이 곳이 시대의 전환 속에서 여러 층위의 역사와 사상을 품어왔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국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향교를 운영하던 시기에도, 한강변의 작은 마을에서는 천주교 신앙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었고 향교가 제도권의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로 다른 가치 체계가 같은 지역에서 동시에 유지됐다는 사실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김성우 안토니오의 삶을 상상해 보건대,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적 예법과 글공부를 익히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그는, 성인이 된 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인물이 됐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과 신앙이 접촉하고 변화하는 모습이 하남의 장소성에 더해진 역동성과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잠시 들러볼 유적, 동사지
교산동에서 멀지 않은 춘궁동 금암산 자락에는 고려 전기 사찰터인 동사지(사적)가 자리한다. 대형 금당터와 석탑이 남아 있어 하남 지역 불교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구산성지와 광주향교에 이어, 불교까지 더해진 지역의 또 다른 전통을 확인할 수 있어 하남의 종교와 사상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기자 admin@gamemong.info
구산성지 정문. 김지영
바다이야기오락실◇ 거북이 언덕에서 꽃핀 신앙, 구산성지
하남 망월동은 본래 '망월포'라 불리던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장마철이면 한강 수위가 높아져 본류에서 갈라진 샛강이 구산마을 안쪽까지 흘러들었다. 물길이 넓어지며 자연스레 얕은 포구가 만들어졌고, 이곳은 강을 오가던 배들이 잠시 정박하며 쉬어가던 지점으로 활용됐다. 마을 뒤에 자리한 낮은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구릉은 거북이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구산(龜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신도시 속에서 찾기 어려워졌지만, 이곳은 19세기 조선 후기 박해 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은둔했던 곳이었다.
구산마을 출신의 김성우(1795~1841)는 지역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고, 서학을 접한 뒤 가족과 이웃에게 신앙을 전파해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드는 데 바다이야기게임 큰 역할을 했다. 183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인 신부 모방(Maubant) 신부가 구산에 공소를 세우며 김성우를 평신도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러나 박해의 물결은 구산도 비켜가지 않았다.
김성우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15개월의 옥살이를 견디고 1841년 한양 포도청에서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 구 모바일릴게임 산으로 돌아와 안장됐고, 이후 이 마을에서는 9명의 순교자가 더 나왔다. 지금의 구산성지는 바로 이 순교자들의 묘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지다. 묘역은 건립 이래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김성우의 후손과 신자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이 자리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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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성지 내 성인묘역으로 들어가는 문, 안당문. 김지영
성지 안에는 '안당문'이라 불리는 입구, 순교자의 묘역, 초봉헌실, 성당 등이 갖춰져 있다. 구산성지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오랜 시간의 울림을 주는 공간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전통 건축기법을 품은 독특한 성지 경관
구산성지는 둘레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기와를 켜켜이 쌓은 모습으로 한국적 정취가 강하다. 성지 안에 들어가 보면 성당, 묘역, 조형물 곳곳에서 기와가 주재료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성지임에도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성지 안에 자리한 성당 건물은 벽돌이나 석조로 외벽을 드러내는 다른 성당과 달리, 외벽 전체를 전통 기와로 마감했다.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외장을 기와로 두르고, 창문은 한국식 전통 창호의 형태를 본떠 제작해 성당이 성지 전체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의도한 흔적이 엿보인다. 성지 중심부의 9인 성인묘역 둘레를 감싸는 낮은 기와담장은 한국적 미감과 정갈함을 동시에 전한다.
낮은 기와담장으로 둘러싸인 성인묘역 입구. 김지영
성당 입구에는 '기왓장 봉헌'이라는 익숙하지만 어딘가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 있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이 기와에 이름을 적어 봉헌하면, 이를 성지 정문 조성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왓장 시주는 보통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천주교 성지에서 같은 방식을 도입한 것은 신앙 실천을 보다 친숙한 문화와 연결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전통식 기와로 지어진 성당. 김지영
◇전쟁 이후 신자들이 세운 작은 성당, 그리고 '이축'이라는 새로운 선택
구산마을의 신앙은 근현대에도 이어졌다. 한국전쟁 직후 신자들은 힘을 모아 1956년 벽돌 조적조 성당을 직접 건립했다. 한강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 나르며 만든 벽돌로 지어진 소박한 성당은 당시 지역 공동체의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2000년대 미사강변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성당은 철거 위기에 놓였다. 인근의 구산성지는 향토유적으로 보호됐지만, 성당은 보존 대상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결국 신자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성당을 '통째로 이동'시키는 방식을 선택했고, 2016년 약 200m 떨어진 자리로 성당을 해체하지 않은 채 옮기는 작업이 이뤄졌다. 조적조 건물을 원형 그대로 이전한 국내 첫 사례다. 성당의 원래 자리에서 보이던 한강 풍경과 언덕 지형은 잃었지만, 공동체가 스스로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은 한국 근대문화유산 보존 사례 중에서도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광주향교 입구. 김지영
◇하남의 또 다른 뿌리, 광주향교
구산성지에서 교산동으로 이동하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들판 너머로 조용한 전통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광주향교다. 조선시대 지방 유학 교육과 제향(祭享)의 중심이었던 관학 기관으로, 현재는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향교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지만, 170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주향교는 전국에서도 드물게 평지에 세워졌으며,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그 앞에 마주 선 동재와 서재가 있다. 뒤쪽에는 공자와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대성전이 자리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광주향교 앞 수령이 500년 된 은행나무. 김지영
향교 입구에 서 있는 수령 400~500년 된 은행나무 다섯 그루는 이곳의 상징이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 고사를 한국적 방식으로 구현한 것으로, 유학 교육의 장소라는 상징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식재된 사례가 많다. 중국에서는 '살구나무 아래 학당'을 의미하던 전통이 한국에서는 은행나무로 치환돼 성균관과 지방 향교의 상징 수목으로 자리 잡았다. 광주향교에 관해 전해지는 고사에 따르면, 이 자리는 거북이 형국의 명당으로 여겨져 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향교 안팎이 노란 잎으로 물들며, 조선시대 교육과 제향이 함께 이뤄지던 공간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광주향교는 단지 옛 교육 공간이 아니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전통문화 행사, 공연 등이 열리며 지역 시민들의 문화적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향교 관련 문헌과 유물들은 하남역사박물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현장 답사와 박물관 관람을 함께하면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구조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산성지 내 성인묘역. 김성우 안토니오가 묻혀 있다. 김지영
◇ 하나의 도시, 겹쳐진 사상과 신앙의 흔적
두 문화유산을 따라가다 보면, 이 곳이 시대의 전환 속에서 여러 층위의 역사와 사상을 품어왔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국가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향교를 운영하던 시기에도, 한강변의 작은 마을에서는 천주교 신앙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었고 향교가 제도권의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로 다른 가치 체계가 같은 지역에서 동시에 유지됐다는 사실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김성우 안토니오의 삶을 상상해 보건대,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적 예법과 글공부를 익히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은 그는, 성인이 된 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인물이 됐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과 신앙이 접촉하고 변화하는 모습이 하남의 장소성에 더해진 역동성과 유연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잠시 들러볼 유적, 동사지
교산동에서 멀지 않은 춘궁동 금암산 자락에는 고려 전기 사찰터인 동사지(사적)가 자리한다. 대형 금당터와 석탑이 남아 있어 하남 지역 불교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구산성지와 광주향교에 이어, 불교까지 더해진 지역의 또 다른 전통을 확인할 수 있어 하남의 종교와 사상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기자 admin@gamemo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