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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알리스의 작용 원리자연스러운 회복
그 남자의 미소가 다시 살아난 이유시알리스가 바꾼 중년의 삶
중년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 가정의 기둥으로 살아가며 사회의 책임을 짊어진 세월. 어느새 거울 속에 낯선 모습이 비치고, 예전의 활력은 점점 흐려진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지만, 진짜 무게는 마음속에 있다. 특히 남자에게는 말 못할 변화가 찾아온다. 바로 성기능 저하다.
과거엔 아무렇지 않게 가능했던 일이 이젠 머뭇거리게 만들고, 부부 관계는 서서히 단절된다. 나 또한 그랬다. 아내의 눈길을 피하고, 애써 대화를 피했으며, 밤은 그저 잠자기 위한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력함을 깨뜨린 건 하나의 결심이었다. 나는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시알리스를 알게 되었고, 그 선택이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남성 기능 저하조용한 자존감의 침식
남성의 성기능은 단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로서의 자신감, 정체성, 관계의 온기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다. 그런데 이 기능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둔화된다. 발기가 잘 되지 않거나 지속 시간이 짧아지고, 성욕은 있어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혈관의 노화, 호르몬 변화, 스트레스, 당뇨나 고혈압 같은 질환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반복되면 자신감마저 사라진다는 점이다. 한두 번의 실패는 단순한 실수로 넘길 수 있지만, 그것이 누적되면 성관계를 피하게 된다. 파트너와의 거리도 점점 멀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은 말없이 무너지고, 결국 외면이라는 방어기제를 택하게 된다.
시알리스의 작용 원리자연스러운 회복
시알리스는 타다라필Tadalafil을 주성분으로 하는 발기부전 치료제다. 음경 내 혈관을 확장시켜 성적 자극 시 혈액이 충분히 유입되도록 도와 발기 능력을 개선한다. 하지만 시알리스의 진짜 강점은 지속 시간에 있다. 일반적인 약물은 수 시간 내 효과가 끝나지만, 시알리스는 최대 36시간까지 효과가 유지된다.
이 말은 곧,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약을 복용한 후 무조건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것이다. 이 여유는 중년 남성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다. 성생활이 다시 즐거워질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시알리스는 10mg, 20mg의 필요 시 복용 형태와, 2.5mg, 5mg의 매일 복용 형태가 있다. 매일 복용 시에는 성관계가 예정되지 않아도 꾸준히 기능이 유지되어 일상의 자연스러운 관계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
복용 방법과 주의 사항전문가의 조언을 따르자
시알리스는 식사와 관계없이 복용 가능하며, 성적 자극 시에만 효과가 발휘된다. 복용 후 약 30분에서 1시간 사이에 효과가 시작되고, 36시간까지 지속되므로 자신에게 맞는 타이밍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약이 그렇듯 부작용과 주의점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대표적인 부작용은 두통, 소화불량, 안면 홍조, 허리 통증 등이며, 대부분 일시적이고 경미한 편이다.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복용 전 반드시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
심혈관 질환이나 협심증 이력이 있는 경우
니트로글리세린계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
신장이나 간 기능이 약한 경우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또는 낮은 경우
또한 다른 발기부전 치료제와 혼용하지 말고, 알코올과의 과도한 병용은 삼가야 한다.
시알리스가 바꿔놓은 삶의 질
복용 후 변화는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성관계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지자, 관계 자체가 더 따뜻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아내와의 대화가 살아났고, 서로의 눈을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성기능이 회복되니 일상의 활력도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내가 되어 있었고, 업무에도, 여가에도 열정이 생겼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미소였다. 예전엔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내 표정이, 이제는 아내 앞에서도 당당해졌다. 부끄럽지 않은 남자, 책임질 수 있는 남자, 그게 다시 된 것이다.
성기능 회복남자의 전반적인 건강 지표
성기능은 남성의 전반적인 건강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특히 심혈관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발기부전은 때로는 더 큰 질환의 전조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성기능 저하가 느껴질 때 단순히 나이 탓으로 넘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원인을 확인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알리스는 단지 성생활의 질을 높이는 약이 아니라, 삶 전체의 리듬을 되찾아주는 하나의 솔루션이다. 한 번의 선택이 남자의 자존감을 되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삶의 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무리침묵했던 밤, 다시 웃는 아침
말하지 않아도 남자라면 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자신을 무너뜨리는지. 성기능 저하는 남자의 문제를 단순히 잠자리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며, 존재에 대한 의심이다.
시알리스는 그 의심을 해소해주는 조용한 해답이다. 단순한 약이 아니라, 다시 웃게 해주는 계기이자, 남자로서의 자신을 회복시키는 출발점이다.
지금 당신이 예전의 나처럼 무기력한 밤을 보내고 있다면, 이제는 변화할 시간이다. 관계의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다면, 자신 있게 나를 바라보는 웃음을 되찾고 싶다면, 시알리스는 확실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 남자의 미소가 다시 살아난 이유, 그 중심엔 바로 시알리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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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gamemong.info
지난해 12월 3일, 불법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안팎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의 사투가 시작됐다. 누군가는 퇴근길에, 누군가는 가족과 집에 있다가, 또 누군가는 국회에서 근무하다가 그곳으로 향했다. 직업도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국회는 무너져선 안 된다’는 마음 하나로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뛰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계엄 1년을 맞아 ‘그날’ 국회에 있었던 시민 15명을 만났다. 계엄 선포부터 해제까지 걸린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시민들은 처음엔 믿기 힘든 ‘당혹’을, 이후엔 모여 바다이야기APK 든 사람 속에서 ‘연대’를, 그리고 계엄 해제 순간에는 ‘안도와 벅참’을 떠올렸다고 공통으로 증언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섰던 군·경은 ‘고통’과 ‘후회’를 털어놨다.
● “뛰는 길에 유서 써” “가족 만류에도 ‘지키러’”
오후 10시 27분, 강 골드몽 영수 노무사(33)는 평범한 화요일 밤을 보내던 중 형에게서 걸려 온 전화로 잠에서 깼다. “계엄했다는데….”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신발을 챙겼다. 강남구 자택에서 국회까지 향하는 30분 동안 그는 카카오톡에 짧은 유서를 남겼다. ‘겁난다.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그냥 움직이고 있다.’
릴게임사이트
12·3 계엄 당시 국회로 향하며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유서와도 같은 메시지를 남겼던 강영수 노무사(33)가 지난달 25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당시 심경을 설명하고 바다이야기게임기 있다. 강 노무사는 “잡혀가서 죽는 거 아닌지 걱정도 밀려왔지만, 태어나서 알던 대한민국이 무너질 거란 확신에 바로 국회로 갔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모바일릴게임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용기 낸 이들도 있었다. 네 아이를 둔 오수정 씨(49)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암울한 미래가 머리에 그려졌다고 한다. 그런 나라에서 아이들을 살게 할 순 없었다.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신발을 구겨 신는데 중학생인 막내딸이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가서 위험한 일 당하면 어떡해.” 오 씨는 차분하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나라 군인 경찰 아저씨, 그런 사람들 아니야. 걱정하지 마.”
대학원생 김규리 씨(25)는 한 시간 정도 고민하다가 이렇게 결심했다. ‘어차피 잠 자긴 글렀는데, 머릿수라도 보태는 게 낫겠지.’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뒤숭숭하다. 어디 나가지 말아라.” 김 씨는 “네”라고 대답하면서 길을 나섰다.
12·3 계엄 당일 국회 앞 현장에 있었던 네 자녀의 어머니인 오수정 씨(49)가 지난달 27일 용인구의 한 카페에서 당시 현장에서 찍은 본인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 씨는 “계엄령 선포 속보를 보고 ‘네 아이의 엄마로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국회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시민을 믿고 두려움 없이 나설 것”이라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마포구에 살던 이석찬 씨(33)는 국회를 향해 무작정 달렸다. 빌릴 수 있는 따릉이가 한 대도 없었고, 택시도 안 잡혔다. 박민상 씨(25)는 연인과 저녁을 먹고 귀가하다가 소식을 들었다. 누구에게 설명할 정신도 없이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상공에서 들려오는 헬기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계엄 소식을 듣자마자 5분 만에 짐을 싸 국회로 향했던 대학원생 박민상 씨(25)가 지난달 26일 국회 계엄 해제 상징석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박 씨는 “민주화의 공고한 탑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며 “공동체를 부정하는 시도에는 시민들이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경기 고양시에서 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최영신 씨(41)는 잠든 임산부 아내에게 차마 ‘국회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차를 끌고 나왔다. 그는 “장갑차가 진입한다면 내 차로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향했다”고 했다. 역사 교사를 지망하는 한일환 씨(25)는 미래의 제자를 떠올리며 경북 경산에서 밤중 4시간 동안 렌터카를 몰고 국회로 향했다.
●“담 넘고 3겹 스크럼… 연대가 솟았다”
혼란한 마음을 안은 이들이 국회에 모인 건 4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국회 담장 앞, 봉쇄된 문을 사이에 두고 시민들은 군·경이 마주 선 자리에서 긴장감과 연대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김원경(44) 방희준 씨(48) 부부는 강동구 자택을 나서며 혹시 모를 구금에 대비해 당뇨약 일주일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국회 담에 걸린, 앞서 넘어간 시민이 걸어둔 태권도 도복 띠를 보는 순간 불안감이 사라졌다. 김 씨 부부는 그렇게 ‘즉석 사다리’를 붙들고 담을 넘었다.
12·3 계엄 당시 “구금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주일 치 당뇨약(인슐린)까지 챙겨 국회로 향했던 방희준(48) 김원경 씨(44) 부부가 지난달 27일 국회운동장에서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 씨는 “서로 모르는 시민들이 말없이 돕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언제든 다시 힘을 합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고 했다. 방 씨는 “계엄 이후 시민들이 정치가 운전대를 제대로 잡고 있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국회 정문 앞에는 군·경의 진입을 막기 위한 ‘3겹 스크럼’이 만들어졌다. 이석찬 씨는 처음에는 다들 ‘혹시라도 표결이 실패해 우리가 잡혀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에 떨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같은 두려움을 안고 나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용기를 줬다고 했다. 그는 ‘잡혀가면 잡혀가는 거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스크럼에 섰다.
12·3 계엄 소식을 듣고 경북 경산에서 렌터카를 몰고 4시간을 달려 국회로 왔던 역사교육학 전공 대학원생 한일환 씨(25)가 지난달 29일 국회 광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씨는 “‘비상계엄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꼭 교단에 서야겠다는 동력으로 바뀌었다”며 “그 날을 계기로 학생들이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도록 돕는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조승연 cho@donga.com
군·경과의 충돌을 막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강영수 노무사는 “격해지는 순간마다 오히려 시민들이 경찰을 말렸다”고 했다. “이분들도 갑자기 끌려나온 거라 당황스러울 것”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 본회의 시스템 지켜낸 보이지 않는 손들
국회에는 알려지지 않은 조력자도 있었다. 본회의를 열어도 신속하게 계엄을 해제하려면 전자투표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필요했다. 이광복 대신정보통신 이사(58)도 그중 한 명이었다.
3일 오후 11시 40분경 이 이사가 국회에 도착했을 때 담장 안으로 넘겨준 건 다른 시민이었다. 이 이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소리 지르자 한 노신사가 눈짓을 줬다. ‘내가 막을 테니 들어가라’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렇게 이 이사는 바리케이드를 디딤돌 삼아 담장을 넘었고, 본관까지 전력 질주했다. 가까스로 도착해 투표 시스템을 열었는데, 투표 단말기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작동했다. 천운이었다.
12·3 계엄 당시 봉쇄된 국회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 전자투표 시스템을 가동했던 이광복 대신정보통신 이사(58)가 지난달 25일 국회 전산실 앞에서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이사는 “직업적 의무감으로 달려갔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옳은 일을 하게 돼 뿌듯하다”며 “평소 1, 2개씩 오류가 나던 단말기 300개가 그날따라 한 번에 켜진 건 ‘천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국회 방호과에서 일하는 박유수 주무관(39)은 의원회관에서 당직을 서던 중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전 직원 즉시 출근. 월담해서라도 본청으로 집결하라.’ 본관 1층으로 달려가니 군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이 군화에 밟히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군인이 든 소총줄을 무작정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손이 찢어진 건 나중에야 알았다.
12·3 계엄 당시 방검복도 없이 맨몸으로 무장 군인들을 막아냈던 박유수 국회 방호과 주무관(39)이 지난달 30일 국회 정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주무관은 “양복을 입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그날 국회 직원 130여 명이 휴가와 연수까지 반납하고 현장을 지켰다”고 했다. 그는 “안 보이는 곳에서 국회를 지킨 사람들도 있었다”며 “수고했다는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 가결 후 환호보다 컸던 안도의 한숨
4일 오전 1시 1분, 국회에서 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통과되자 국회 앞에 모인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벅찬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석찬 씨는 “가결 직후 환호성보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더 컸다”고 했다. 이내 국회 밖에서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수백 명의 시민이 따라 불렀다고 한다. 박민상 씨는 “‘이렇게 화가 난 시민이 여전히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희망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2·3 계엄 당시 국회 앞에서 군용 버스를 막아섰던 한광섭(56) 행정사가 1년 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 씨는 “누군가 ‘(군인이 탄) 버스 문을 못 열게 막자’고 외치자 순식간에 시민들이 스크럼을 짰다”며 “국가적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시민들의 응집된 힘을 다시금 확인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최효정 기자 hyoehyoe22@donga.com
하지만 계엄 해제 직후에도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다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 앞에 있었던 한광섭 행정사(56)는 “돌아보면 ‘우리가 이겼다’는 승리감도 분명 있었지만, 그땐 ‘2차 계엄이 또 나올 수 있다’는 긴장감이 훨씬 컸다”고 했다. 그래서 대다수 시민은 동이 틀 때까지 국회 앞을 떠나지 않았다.
● “과거가 현재를 붙들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나흘 후 소설가 한강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들은 그날의 경험을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2·3 계엄 당시 ‘가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했던 황인수 신부(57)가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성바오로서원 내 카페에서 1년 전 그날을 회상하고 있다.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5·18 광주의 공포를 가까이 겪었던 황 신부는 “과거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며 “이번 계엄 현장에서 이름 없는 시민들이 뿌리처럼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열네 살 때 전남 목포에서 5·18을 직접 목격한 황인수 신부(57)는 “그날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며 살아왔다”며 “그때 누군가가 지키지 못했다면, 이번엔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5·18 때 어른들이 보여준 용기와 두려움, 그 뒤의 침묵을 기억한다. 이번엔 침묵하는 편에 서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광복 이사는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훗날엔 이 일 또한 과거가 되어 또 다른 미래, 그때의 현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계엄 1년. 그날 국회를 지킨 시민 15명이 입을 모아 강조한 건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나온 평범한 시민들이 계엄을 막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국회 앞에 켜졌던 불빛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야, 다음 비상 상황에서도 민주주의가 버틸 수 있다”는 경고였다.
● “스스로에게 자긍심…인간에 대한 신뢰 생겨”
불법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년. 당시 국회로 달려와 군 병력에 맞섰던 시민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날의 경험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성하는 내밀한 기억으로 남았다. 국회 앞에서 뛰고, 붙잡고, 밀치며 서로를 확인했던 순간은 이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신뢰를 되살린 시간이었고, 동시에 ‘그날 그곳에 있었던 나’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국회 방호과에서 일하는 김영완 주무관(51)은 지금도 국회를 지킨다. 언성을 높이는 민원인을 진정시키고, 늦은 밤에 불 꺼진 국회를 순찰하는 일상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김 주무관은 “예전에 국회는 직장으로서 의미가 더 컸지만, 이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공간을 지킨다는 사명감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계엄 선포 직후 따릉이 자전거가 모두 동나자 마포에서 국회까지 30분을 달려갔던 이석찬 씨(33)가 지난달 25일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씨는 “헬기가 뜨고 군용 차량이 지나가는 걸 보며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제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상식에 대해 할 말은 하기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학원생 김규리 씨는 최근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부쩍 바빠졌다. 김 씨는 비상계엄 이전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계엄 당일 이후 꾸준히 집회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예비 심사를 앞두고 마음이 가라앉아 있던 때였는데, 시민들과 연대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며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순간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계엄 당시 침대에 누워 고민하다 막차를 타고 국회로 향했던 대학원생 김규리 씨(25)가 지난달 26일 국회 앞에서 당시 심경을 밝히고 있다. 김 씨는 “지금 안 나가면 오늘 밤은 절대 잠을 못 잘 것 같아 사람 머릿수 하나라도 보태자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그날의 선택 덕분에 스스로에게 떳떳한 기억 하나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시민들은 그날의 경험이 ‘민주주의와 자신을 지탱하는 기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최영신 씨는 “계엄 직후 한동안 군 헬기가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렸다”면서도 “현장에서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던 경찰과 군인을 목격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한일환 씨는 “1년 전 비상계엄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이젠 교단에 서야 하는 동력이 되었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강영수 노무사는 “계엄 사태를 거치며 ‘해선 안 될 일’에 대한 전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게 큰 성과”라고 말했다.
12·3 계엄 당시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장갑차가 오면 차로라도 막겠다”며 국회로 향했던 최영신 씨(41)가 지난달 28일 국회 앞에서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신 씨는 “계엄 직후 한동안 군 헬기가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렸다”면서도 “현장에서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던 경찰과 군인을 목격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양극화 아쉬워… 이제는 우리가 미래 지켜야”
상흔도 컸다. 이석찬 씨는 몇몇 친구가 ‘(국회 앞을 막아선 시민을) 다 잡아서 없앴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 연락을 끊었다. 그는 “그날 현장에 있던 내가 잡혀갔다면 똑같이 말하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전엔 사회생활에서 튈까 조심했지만, 이제는 해야 할 말은 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박유수 주무관은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말을 더듬게 된다고 한다. 13년간 방호 업무를 해왔지만, 그날만큼 급박한 순간은 없었다. 본 회의장 2층에서 수십 명의 군인을 마주한 순간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22년차 국회 방호담당과 주무관인 김영완 씨(51)가 국회에서 12.3 계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 본관 지하통로에서 공수부대 인원들이 전원 차단 및 출입문 봉쇄를 시도하는 것을 제지했던 그는 “국회 방호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시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생업을 제쳐두고 달려와 맨몸으로 군인을 막아준 시민들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시민들은 계엄 이후 양극화된 사회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원경 씨는 “계엄 이후 극단적으로 정치화한 청년들이 늘었다”며 “정치적 관심은 필요하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규리 씨는 “계엄이 정권 교체를 위한 대형 사건처럼만 소비되고 취약한 시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했다.
계엄 속보를 접한 순간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한 직장인 류호성 씨(34)가 지난달 27일 합정역 인근의 한 사무실에서 12·3 계엄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류 씨는 “시민들의 힘으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군부독재나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던 중대한 사안이었다”며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계엄 속보를 접한 순간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한 직장인 류호성 씨(34)는 “계엄은 시민들의 힘으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군부독재나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던 중대한 사안이었다”며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황인수 신부는 지금의 상황을 ‘솔로몬의 재판’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계속 서로를 적으로 보는 것이 안타깝다”며 “반쪽짜리 아기라도 차지하겠다는 식으로 자기 이익만 앞세우면 혼란은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조승연 기자 cho@donga.com
최효정 기자 hyoehyoe22@donga.com
동아일보 취재팀은 계엄 1년을 맞아 ‘그날’ 국회에 있었던 시민 15명을 만났다. 계엄 선포부터 해제까지 걸린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시민들은 처음엔 믿기 힘든 ‘당혹’을, 이후엔 모여 바다이야기APK 든 사람 속에서 ‘연대’를, 그리고 계엄 해제 순간에는 ‘안도와 벅참’을 떠올렸다고 공통으로 증언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섰던 군·경은 ‘고통’과 ‘후회’를 털어놨다.
● “뛰는 길에 유서 써” “가족 만류에도 ‘지키러’”
오후 10시 27분, 강 골드몽 영수 노무사(33)는 평범한 화요일 밤을 보내던 중 형에게서 걸려 온 전화로 잠에서 깼다. “계엄했다는데….”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신발을 챙겼다. 강남구 자택에서 국회까지 향하는 30분 동안 그는 카카오톡에 짧은 유서를 남겼다. ‘겁난다.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그냥 움직이고 있다.’
릴게임사이트
12·3 계엄 당시 국회로 향하며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에 유서와도 같은 메시지를 남겼던 강영수 노무사(33)가 지난달 25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당시 심경을 설명하고 바다이야기게임기 있다. 강 노무사는 “잡혀가서 죽는 거 아닌지 걱정도 밀려왔지만, 태어나서 알던 대한민국이 무너질 거란 확신에 바로 국회로 갔다”고 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모바일릴게임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용기 낸 이들도 있었다. 네 아이를 둔 오수정 씨(49)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암울한 미래가 머리에 그려졌다고 한다. 그런 나라에서 아이들을 살게 할 순 없었다.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신발을 구겨 신는데 중학생인 막내딸이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가서 위험한 일 당하면 어떡해.” 오 씨는 차분하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나라 군인 경찰 아저씨, 그런 사람들 아니야. 걱정하지 마.”
대학원생 김규리 씨(25)는 한 시간 정도 고민하다가 이렇게 결심했다. ‘어차피 잠 자긴 글렀는데, 머릿수라도 보태는 게 낫겠지.’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뒤숭숭하다. 어디 나가지 말아라.” 김 씨는 “네”라고 대답하면서 길을 나섰다.
12·3 계엄 당일 국회 앞 현장에 있었던 네 자녀의 어머니인 오수정 씨(49)가 지난달 27일 용인구의 한 카페에서 당시 현장에서 찍은 본인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오 씨는 “계엄령 선포 속보를 보고 ‘네 아이의 엄마로서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국회로 향했다”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시민을 믿고 두려움 없이 나설 것”이라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마포구에 살던 이석찬 씨(33)는 국회를 향해 무작정 달렸다. 빌릴 수 있는 따릉이가 한 대도 없었고, 택시도 안 잡혔다. 박민상 씨(25)는 연인과 저녁을 먹고 귀가하다가 소식을 들었다. 누구에게 설명할 정신도 없이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상공에서 들려오는 헬기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계엄 소식을 듣자마자 5분 만에 짐을 싸 국회로 향했던 대학원생 박민상 씨(25)가 지난달 26일 국회 계엄 해제 상징석 앞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박 씨는 “민주화의 공고한 탑이라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며 “공동체를 부정하는 시도에는 시민들이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경기 고양시에서 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최영신 씨(41)는 잠든 임산부 아내에게 차마 ‘국회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차를 끌고 나왔다. 그는 “장갑차가 진입한다면 내 차로라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향했다”고 했다. 역사 교사를 지망하는 한일환 씨(25)는 미래의 제자를 떠올리며 경북 경산에서 밤중 4시간 동안 렌터카를 몰고 국회로 향했다.
●“담 넘고 3겹 스크럼… 연대가 솟았다”
혼란한 마음을 안은 이들이 국회에 모인 건 4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국회 담장 앞, 봉쇄된 문을 사이에 두고 시민들은 군·경이 마주 선 자리에서 긴장감과 연대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김원경(44) 방희준 씨(48) 부부는 강동구 자택을 나서며 혹시 모를 구금에 대비해 당뇨약 일주일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국회 담에 걸린, 앞서 넘어간 시민이 걸어둔 태권도 도복 띠를 보는 순간 불안감이 사라졌다. 김 씨 부부는 그렇게 ‘즉석 사다리’를 붙들고 담을 넘었다.
12·3 계엄 당시 “구금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주일 치 당뇨약(인슐린)까지 챙겨 국회로 향했던 방희준(48) 김원경 씨(44) 부부가 지난달 27일 국회운동장에서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 씨는 “서로 모르는 시민들이 말없이 돕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언제든 다시 힘을 합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고 했다. 방 씨는 “계엄 이후 시민들이 정치가 운전대를 제대로 잡고 있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국회 정문 앞에는 군·경의 진입을 막기 위한 ‘3겹 스크럼’이 만들어졌다. 이석찬 씨는 처음에는 다들 ‘혹시라도 표결이 실패해 우리가 잡혀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에 떨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같은 두려움을 안고 나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용기를 줬다고 했다. 그는 ‘잡혀가면 잡혀가는 거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스크럼에 섰다.
12·3 계엄 소식을 듣고 경북 경산에서 렌터카를 몰고 4시간을 달려 국회로 왔던 역사교육학 전공 대학원생 한일환 씨(25)가 지난달 29일 국회 광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씨는 “‘비상계엄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꼭 교단에 서야겠다는 동력으로 바뀌었다”며 “그 날을 계기로 학생들이 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도록 돕는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조승연 cho@donga.com
군·경과의 충돌을 막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강영수 노무사는 “격해지는 순간마다 오히려 시민들이 경찰을 말렸다”고 했다. “이분들도 갑자기 끌려나온 거라 당황스러울 것”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 본회의 시스템 지켜낸 보이지 않는 손들
국회에는 알려지지 않은 조력자도 있었다. 본회의를 열어도 신속하게 계엄을 해제하려면 전자투표를 관리하는 담당자가 필요했다. 이광복 대신정보통신 이사(58)도 그중 한 명이었다.
3일 오후 11시 40분경 이 이사가 국회에 도착했을 때 담장 안으로 넘겨준 건 다른 시민이었다. 이 이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소리 지르자 한 노신사가 눈짓을 줬다. ‘내가 막을 테니 들어가라’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렇게 이 이사는 바리케이드를 디딤돌 삼아 담장을 넘었고, 본관까지 전력 질주했다. 가까스로 도착해 투표 시스템을 열었는데, 투표 단말기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작동했다. 천운이었다.
12·3 계엄 당시 봉쇄된 국회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 전자투표 시스템을 가동했던 이광복 대신정보통신 이사(58)가 지난달 25일 국회 전산실 앞에서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이사는 “직업적 의무감으로 달려갔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옳은 일을 하게 돼 뿌듯하다”며 “평소 1, 2개씩 오류가 나던 단말기 300개가 그날따라 한 번에 켜진 건 ‘천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국회 방호과에서 일하는 박유수 주무관(39)은 의원회관에서 당직을 서던 중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전 직원 즉시 출근. 월담해서라도 본청으로 집결하라.’ 본관 1층으로 달려가니 군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이 군화에 밟히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군인이 든 소총줄을 무작정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손이 찢어진 건 나중에야 알았다.
12·3 계엄 당시 방검복도 없이 맨몸으로 무장 군인들을 막아냈던 박유수 국회 방호과 주무관(39)이 지난달 30일 국회 정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 주무관은 “양복을 입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그날 국회 직원 130여 명이 휴가와 연수까지 반납하고 현장을 지켰다”고 했다. 그는 “안 보이는 곳에서 국회를 지킨 사람들도 있었다”며 “수고했다는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 가결 후 환호보다 컸던 안도의 한숨
4일 오전 1시 1분, 국회에서 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통과되자 국회 앞에 모인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벅찬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석찬 씨는 “가결 직후 환호성보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 소리가 더 컸다”고 했다. 이내 국회 밖에서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수백 명의 시민이 따라 불렀다고 한다. 박민상 씨는 “‘이렇게 화가 난 시민이 여전히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희망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2·3 계엄 당시 국회 앞에서 군용 버스를 막아섰던 한광섭(56) 행정사가 1년 전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 씨는 “누군가 ‘(군인이 탄) 버스 문을 못 열게 막자’고 외치자 순식간에 시민들이 스크럼을 짰다”며 “국가적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시민들의 응집된 힘을 다시금 확인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최효정 기자 hyoehyoe22@donga.com
하지만 계엄 해제 직후에도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다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 앞에 있었던 한광섭 행정사(56)는 “돌아보면 ‘우리가 이겼다’는 승리감도 분명 있었지만, 그땐 ‘2차 계엄이 또 나올 수 있다’는 긴장감이 훨씬 컸다”고 했다. 그래서 대다수 시민은 동이 틀 때까지 국회 앞을 떠나지 않았다.
● “과거가 현재를 붙들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나흘 후 소설가 한강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로 달려갔던 시민들은 그날의 경험을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2·3 계엄 당시 ‘가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했던 황인수 신부(57)가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성바오로서원 내 카페에서 1년 전 그날을 회상하고 있다.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5·18 광주의 공포를 가까이 겪었던 황 신부는 “과거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며 “이번 계엄 현장에서 이름 없는 시민들이 뿌리처럼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열네 살 때 전남 목포에서 5·18을 직접 목격한 황인수 신부(57)는 “그날 희생된 이들을 떠올리며 살아왔다”며 “그때 누군가가 지키지 못했다면, 이번엔 내가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5·18 때 어른들이 보여준 용기와 두려움, 그 뒤의 침묵을 기억한다. 이번엔 침묵하는 편에 서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광복 이사는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훗날엔 이 일 또한 과거가 되어 또 다른 미래, 그때의 현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계엄 1년. 그날 국회를 지킨 시민 15명이 입을 모아 강조한 건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나온 평범한 시민들이 계엄을 막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국회 앞에 켜졌던 불빛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야, 다음 비상 상황에서도 민주주의가 버틸 수 있다”는 경고였다.
● “스스로에게 자긍심…인간에 대한 신뢰 생겨”
불법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년. 당시 국회로 달려와 군 병력에 맞섰던 시민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날의 경험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성하는 내밀한 기억으로 남았다. 국회 앞에서 뛰고, 붙잡고, 밀치며 서로를 확인했던 순간은 이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신뢰를 되살린 시간이었고, 동시에 ‘그날 그곳에 있었던 나’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국회 방호과에서 일하는 김영완 주무관(51)은 지금도 국회를 지킨다. 언성을 높이는 민원인을 진정시키고, 늦은 밤에 불 꺼진 국회를 순찰하는 일상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김 주무관은 “예전에 국회는 직장으로서 의미가 더 컸지만, 이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공간을 지킨다는 사명감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계엄 선포 직후 따릉이 자전거가 모두 동나자 마포에서 국회까지 30분을 달려갔던 이석찬 씨(33)가 지난달 25일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씨는 “헬기가 뜨고 군용 차량이 지나가는 걸 보며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제는 남 눈치 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상식에 대해 할 말은 하기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학원생 김규리 씨는 최근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부쩍 바빠졌다. 김 씨는 비상계엄 이전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지만, 계엄 당일 이후 꾸준히 집회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예비 심사를 앞두고 마음이 가라앉아 있던 때였는데, 시민들과 연대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었다”며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순간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계엄 당시 침대에 누워 고민하다 막차를 타고 국회로 향했던 대학원생 김규리 씨(25)가 지난달 26일 국회 앞에서 당시 심경을 밝히고 있다. 김 씨는 “지금 안 나가면 오늘 밤은 절대 잠을 못 잘 것 같아 사람 머릿수 하나라도 보태자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는 “그날의 선택 덕분에 스스로에게 떳떳한 기억 하나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시민들은 그날의 경험이 ‘민주주의와 자신을 지탱하는 기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최영신 씨는 “계엄 직후 한동안 군 헬기가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렸다”면서도 “현장에서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던 경찰과 군인을 목격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한일환 씨는 “1년 전 비상계엄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이젠 교단에 서야 하는 동력이 되었다”며 “학생들이 스스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강영수 노무사는 “계엄 사태를 거치며 ‘해선 안 될 일’에 대한 전 국민적 합의가 형성된 게 큰 성과”라고 말했다.
12·3 계엄 당시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장갑차가 오면 차로라도 막겠다”며 국회로 향했던 최영신 씨(41)가 지난달 28일 국회 앞에서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신 씨는 “계엄 직후 한동안 군 헬기가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렸다”면서도 “현장에서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던 경찰과 군인을 목격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양극화 아쉬워… 이제는 우리가 미래 지켜야”
상흔도 컸다. 이석찬 씨는 몇몇 친구가 ‘(국회 앞을 막아선 시민을) 다 잡아서 없앴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 연락을 끊었다. 그는 “그날 현장에 있던 내가 잡혀갔다면 똑같이 말하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전엔 사회생활에서 튈까 조심했지만, 이제는 해야 할 말은 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박유수 주무관은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말을 더듬게 된다고 한다. 13년간 방호 업무를 해왔지만, 그날만큼 급박한 순간은 없었다. 본 회의장 2층에서 수십 명의 군인을 마주한 순간은 큰 충격으로 남았다.
22년차 국회 방호담당과 주무관인 김영완 씨(51)가 국회에서 12.3 계엄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 본관 지하통로에서 공수부대 인원들이 전원 차단 및 출입문 봉쇄를 시도하는 것을 제지했던 그는 “국회 방호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시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생업을 제쳐두고 달려와 맨몸으로 군인을 막아준 시민들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시민들은 계엄 이후 양극화된 사회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원경 씨는 “계엄 이후 극단적으로 정치화한 청년들이 늘었다”며 “정치적 관심은 필요하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규리 씨는 “계엄이 정권 교체를 위한 대형 사건처럼만 소비되고 취약한 시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했다.
계엄 속보를 접한 순간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한 직장인 류호성 씨(34)가 지난달 27일 합정역 인근의 한 사무실에서 12·3 계엄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류 씨는 “시민들의 힘으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군부독재나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던 중대한 사안이었다”며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계엄 속보를 접한 순간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망설임 없이 국회로 향한 직장인 류호성 씨(34)는 “계엄은 시민들의 힘으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군부독재나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던 중대한 사안이었다”며 “이번 일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황인수 신부는 지금의 상황을 ‘솔로몬의 재판’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계속 서로를 적으로 보는 것이 안타깝다”며 “반쪽짜리 아기라도 차지하겠다는 식으로 자기 이익만 앞세우면 혼란은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서로를 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조승연 기자 cho@donga.com
최효정 기자 hyoehyoe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