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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보리쌀 두 되씩 갖고 오시오."
충북 청주시 내덕동 구장이 안터벌에 살던 조연성(1921년생)의 집에 와서 전달한 소식이다. 내덕동 구장은 청주경찰서장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이 내린 지시를 내덕지서장을 통해 전달받아 보도연맹원 집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재전달했다. 구장 옆에는 대한청년단 간부와 의용경찰이 동행했다.
"왜 오라디는디유?""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난리가 나서 먼저 피난시켜 줄라고 한다네요."
조연성의 아내가 묻고 구장이 답했다. 구장은 다른 집을 가려는지 부리나케 삽짝을 밀치고 나 야마토게임예시 갔다. 아들 조인식의 전갈을 듣고 조연성은 무덕관으로 갔다. 다음 날 주먹밥을 갖고 무덕관으로 간 조인식은 아버지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인식아, 전쟁이 났단다. 나는 피난을 가니까 너도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피난 잘 가거라."
그렇게 청주 내덕동 보도연맹원들은 보리쌀 두 되씩을 지참해 청주경찰서 무덕관 바다이야기룰 으로 갔다. 조연성을 포함해 153명이었다.
그런데 내덕동 보도연맹원들은 자신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줄도 모르고 왜 보도연맹 소집에 응했을까. 그들은 차마 대한민국 군경이 자신들을 해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6·25 이전에도 한 달에 한 번꼴로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었고, 반공교육이 진행됐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연례행사일 릴게임한국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예비검속
▲ 유해발굴 청원군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남일면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
ⓒ 박만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소집)에 모두가 순순히 응한 것은 아니었다. 청주시 영운동에 거주하던 박윤하는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을 불렀다. 박윤하는 청주 유지로 평소 신형식과 잘 아는 사이였다.
"신군!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는데 이에 응해도 되겠는가?"
성균관을 나와 박사 직책을 맡은 박윤하는 아들 박희서가 걱정돼 신형식에게 자문을 구했다. 신형식의 답변은 담담했다.
"박 선생님, 절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제분을 청주경찰서 무덕관으로 보내세요. 그냥 의례적인 소집입니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박윤하는 아들을 무덕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박희서는 그 뒤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배우였던 박희서는 그렇게 젊음을 끝내야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2008).
6·25 당시 중앙초등학교 교사였던 박정순은 교장 관사에서 회식 중 청주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빨리 무덕관으로 모이라는 통보였다. 남편은 전쟁 전에 행방불명되었다. 그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박정순은 정신없이 무덕관으로 향했다.
경찰서의 소집 통보를 받고 스스로 경찰서로 향한 이들이 있는 반면,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강영애의 경우는 달랐다.
"정세영·강영애씨 있소?"
총을 멘 남일지서 순경이었다. 이유를 묻는 주인장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순경은 두 사람을 연행했다. 6·25가 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청주 보도연맹원들 모두가 소집에 응하거나 경찰에 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원 책임자들이 눈치껏 몸을 피했다. 전쟁 중 보도연맹원을 소집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안터벌의 김희박(본명 김희정), 영운동의 김싱이(본명 불명), 남이면 석곡리의 박제순이 그런 경우였다.
전혀 상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소집에 응하는 것이 죽음의 골짜기로 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지서로 간 사람도 있었다. 청원군 미원면 보도연맹 책임자 신영우다. 신영우는 경찰들이 도망칠 것을 귀띔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동지들이 모두 죽는데 나만 살 수는 없다"며 지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원 약 1500명을 포함해 충북 지역 보도연맹원 4000여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간접적 책임이 있는 신형식의 행보였다.
박윤하에게 "아무 일 없으니 무덕관으로 가라"고 했던 충북보도연맹 간사장은, 정작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김윤수에게 매달렸다.
"살려 주십시오."
상급 단체의 명령을 받은 청주경찰서가 그를 연행하려 했으나, 김윤수 검사의 보호로 신형식은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전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 김동수의 증언).
임산부에게 가해진 전기고문
1950년 6월 말,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강영애(1925년생)는 형사로부터 뜬금없는 취조를 받았다.
"당신, 언제부터 남로당 가입했어?""당신 남로당에서의 역할이 뭐야"
강영애는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정세영이 해방 후 남로당 활동을 했지만, 그녀는 집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집안 친척의 권유로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본인 역시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다. 사정이 이런데 강영애가 형사에게 답변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형사는 강영애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자 몸에 감은 전깃줄의 전압을 올렸다. '악' 하는 비명과 동시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얼굴에 찬물이 쏟아졌다. 의식이 되돌아왔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간신히 의식을 수습하자 형사는 이내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임산부인 그녀가 전기고문과 몽둥이찜질을 견디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몇 시간의 고문 끝에 형사는 "야, 다시 유치장에 집어넣어"라고 했다.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도 유치장에서 10일간이나 더 구금됐다.
강영애가 전기고문을 당한 지 며칠 후부터 청주시와 청원군 남일면, 옥산면 보도연맹원들이 청주경찰서 무덕관에 구금됐다.
보도연맹원들에게 보리쌀을 갖고 오라고는 했지만, 천여 명의 보도연맹원 식사를 해결할 취사시설은 없었다. 결국 가가호호 통지해 "밥을 갖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밥을 준비해 간 아내와 자식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만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덕관은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송되기 직전의 장소였다. 이는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충북화물자동차 직원이었던 이웅찬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충북은 물론 전국대회에도 출전했던 축구선수 이웅찬을 알아본 경찰이 "담배 사 갖고 오시오"라고 했다.
이웅찬은 그 말이 자신을 살려주려는 뜻인 줄 모르고 담배를 사 갖고 다시 무덕관으로 돌아갔다. 답답해한 경찰은 같은 심부름을 두 번이나 더 시켰다. 그러나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이웅찬은 매번 다시 무덕관으로 돌아왔다.
계단식 논
무덕관 후문에는 트럭 몇 대가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뒷결박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은 2~3명씩 밧줄로 연결돼 적재함에 짐짝처럼 실렸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는 박원규(1928년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형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열여덟 살 박석규의 눈앞은 뿌예졌다.
보도연맹원들을 실은 트럭이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현 공군사관학교 옆)에 정차한 것은 1950년 7월 초순이었다. 이때부터 군인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다뤘다. 잠시 뒤 '피의 살육전'이 시작됐다. 200명이 죽임을 당한 그곳에서 임산부 강영애만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총 8발을 맞고도 말이다.
▲ 강영애 남일면 쌍수리에서 총 8발을 맞고 살아난 강영애
ⓒ 박만순
군 장교는 병사들을 향해 "야! 앞줄부터 쏴!"라고 재촉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이들은 '드디어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탕, 탕, 탕.' 울음소리는 이내 총소리에 묻혔다. 총성과 비명이 뒤엉킨 와중에 강영애 남편 정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렇게 같이 죽는 것도 천생연분이오. 그러니 너무 원통해하지 마시오."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죽음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강영애에게 그 말은 유난히 따뜻하게 들렸다. 곧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쌍수리 다음의 죽음의 골짜기는 분터골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기 전, 청주형무소 재소자 약 300명이 이미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안터벌을 비롯한 청주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분터골은 충북 최대의 학살터로, 모두 1000명이 희생됐다.
보도연맹원들의 손은 광목천과 노끈으로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군인들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며 고함을 질렀다. 트럭 적재함에서 차례로 내려올 수도 없었던 이들은 굴러 떨어지듯 내동댕이쳐졌다. 군인들은 "이 XX들이 XX라고 지X들 하는구만"이라며 총 개머리판으로 보도연맹원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죽음의 대열은 길가에서 산골짜기로 향했다. 나지막한 산 중턱에는 계단식 논이 있었다. 맨 위의 계단식 논에 열 명의 보도연맹원이 세워졌다. "조준, 발사!"하는 소리와 함께 보도연맹원들이 집단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4일간, 7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뒤늦게 분터골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내덕동 의용경찰 장기암은 자전거를 타고 고은삼거리를 지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큰길에서 경찰에게 가로막혔다. "처형은 다 끝났고, 지금 확인사살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막내 매형을 살려 볼 요량으로 죽도록 페달을 밟았던 장기암은 허탈함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1950년 7월 9일이었다.
속리산 구경시켜 준다더니
박정순과 올케 최재덕(1927년생)은 트럭에 실린 채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파랬지만 마음속은 새카맸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흥얼거리고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태우며 군인들이 "속리산 구경시켜 준다"고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들이었다.
1950년 7월 12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 GMC 트럭 여러 대가 먼지를 흩날리며 도착했다. 트럭을 길가에 세운 군인과 경찰은 논과 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주민들에게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수백 발의 총소리가 아곡리 마을과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총소리와 함께 피울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청주 보도연맹원 약 150명이 보은 땅까지 끌려와 학살된 순간이었다.
▲ 박정순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학살당한 박정순
ⓒ 최계자
총살 직후 경찰들은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남성 청장년들을 소집해 "빨갱이들 잡아 놨으니까 장례 치러라"며 시신 수습을 강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세 곳의 학살 지점 인근에 시신을 매장했다.
여성 보도연맹원 3명은 별도로 학살됐는데, 시신 수습 과정에서 속옷 속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주민들은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충북보도연맹 사무실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미원국민학교로 이송됐다가 다시 청주형무소로 돌아온 날은 1950년 7월 5일이었다. 이들이 다시 미원을 경유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로 끌려간 것은 7월 12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쌍수리, 분터골, 아곡리에서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주체를 청주경찰서 경찰과 제2사단 제16연대 헌병대로 추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보도연맹사건 보고서, 2008).
보도연맹원들이 주검으로 변해 가는 동안,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은 청주지검장의 보호 아래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으로 향하던 도중 보은군 원남면에서 충북도경국장 이시환이 술자리를 벌였고, 그 자리에는 신형식도 함께 있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보리쌀 두 되씩 갖고 오시오."
충북 청주시 내덕동 구장이 안터벌에 살던 조연성(1921년생)의 집에 와서 전달한 소식이다. 내덕동 구장은 청주경찰서장 오션파라다이스사이트 이 내린 지시를 내덕지서장을 통해 전달받아 보도연맹원 집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재전달했다. 구장 옆에는 대한청년단 간부와 의용경찰이 동행했다.
"왜 오라디는디유?""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난리가 나서 먼저 피난시켜 줄라고 한다네요."
조연성의 아내가 묻고 구장이 답했다. 구장은 다른 집을 가려는지 부리나케 삽짝을 밀치고 나 야마토게임예시 갔다. 아들 조인식의 전갈을 듣고 조연성은 무덕관으로 갔다. 다음 날 주먹밥을 갖고 무덕관으로 간 조인식은 아버지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인식아, 전쟁이 났단다. 나는 피난을 가니까 너도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피난 잘 가거라."
그렇게 청주 내덕동 보도연맹원들은 보리쌀 두 되씩을 지참해 청주경찰서 무덕관 바다이야기룰 으로 갔다. 조연성을 포함해 153명이었다.
그런데 내덕동 보도연맹원들은 자신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줄도 모르고 왜 보도연맹 소집에 응했을까. 그들은 차마 대한민국 군경이 자신들을 해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6·25 이전에도 한 달에 한 번꼴로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었고, 반공교육이 진행됐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연례행사일 릴게임한국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예비검속
▲ 유해발굴 청원군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남일면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
ⓒ 박만순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소집)에 모두가 순순히 응한 것은 아니었다. 청주시 영운동에 거주하던 박윤하는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을 불렀다. 박윤하는 청주 유지로 평소 신형식과 잘 아는 사이였다.
"신군! 보도연맹원 소집이 있는데 이에 응해도 되겠는가?"
성균관을 나와 박사 직책을 맡은 박윤하는 아들 박희서가 걱정돼 신형식에게 자문을 구했다. 신형식의 답변은 담담했다.
"박 선생님, 절대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제분을 청주경찰서 무덕관으로 보내세요. 그냥 의례적인 소집입니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박윤하는 아들을 무덕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박희서는 그 뒤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배우였던 박희서는 그렇게 젊음을 끝내야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2008).
6·25 당시 중앙초등학교 교사였던 박정순은 교장 관사에서 회식 중 청주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빨리 무덕관으로 모이라는 통보였다. 남편은 전쟁 전에 행방불명되었다. 그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박정순은 정신없이 무덕관으로 향했다.
경찰서의 소집 통보를 받고 스스로 경찰서로 향한 이들이 있는 반면,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강영애의 경우는 달랐다.
"정세영·강영애씨 있소?"
총을 멘 남일지서 순경이었다. 이유를 묻는 주인장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순경은 두 사람을 연행했다. 6·25가 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청주 보도연맹원들 모두가 소집에 응하거나 경찰에 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원 책임자들이 눈치껏 몸을 피했다. 전쟁 중 보도연맹원을 소집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안터벌의 김희박(본명 김희정), 영운동의 김싱이(본명 불명), 남이면 석곡리의 박제순이 그런 경우였다.
전혀 상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소집에 응하는 것이 죽음의 골짜기로 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스스로 지서로 간 사람도 있었다. 청원군 미원면 보도연맹 책임자 신영우다. 신영우는 경찰들이 도망칠 것을 귀띔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동지들이 모두 죽는데 나만 살 수는 없다"며 지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원 약 1500명을 포함해 충북 지역 보도연맹원 4000여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간접적 책임이 있는 신형식의 행보였다.
박윤하에게 "아무 일 없으니 무덕관으로 가라"고 했던 충북보도연맹 간사장은, 정작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김윤수에게 매달렸다.
"살려 주십시오."
상급 단체의 명령을 받은 청주경찰서가 그를 연행하려 했으나, 김윤수 검사의 보호로 신형식은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전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 김동수의 증언).
임산부에게 가해진 전기고문
1950년 6월 말,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강영애(1925년생)는 형사로부터 뜬금없는 취조를 받았다.
"당신, 언제부터 남로당 가입했어?""당신 남로당에서의 역할이 뭐야"
강영애는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정세영이 해방 후 남로당 활동을 했지만, 그녀는 집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집안 친척의 권유로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본인 역시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었다. 사정이 이런데 강영애가 형사에게 답변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형사는 강영애로부터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자 몸에 감은 전깃줄의 전압을 올렸다. '악' 하는 비명과 동시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얼굴에 찬물이 쏟아졌다. 의식이 되돌아왔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간신히 의식을 수습하자 형사는 이내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임산부인 그녀가 전기고문과 몽둥이찜질을 견디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몇 시간의 고문 끝에 형사는 "야, 다시 유치장에 집어넣어"라고 했다.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도 유치장에서 10일간이나 더 구금됐다.
강영애가 전기고문을 당한 지 며칠 후부터 청주시와 청원군 남일면, 옥산면 보도연맹원들이 청주경찰서 무덕관에 구금됐다.
보도연맹원들에게 보리쌀을 갖고 오라고는 했지만, 천여 명의 보도연맹원 식사를 해결할 취사시설은 없었다. 결국 가가호호 통지해 "밥을 갖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밥을 준비해 간 아내와 자식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만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덕관은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송되기 직전의 장소였다. 이는 죽음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충북화물자동차 직원이었던 이웅찬에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충북은 물론 전국대회에도 출전했던 축구선수 이웅찬을 알아본 경찰이 "담배 사 갖고 오시오"라고 했다.
이웅찬은 그 말이 자신을 살려주려는 뜻인 줄 모르고 담배를 사 갖고 다시 무덕관으로 돌아갔다. 답답해한 경찰은 같은 심부름을 두 번이나 더 시켰다. 그러나 법 없이도 살 수 있었던 이웅찬은 매번 다시 무덕관으로 돌아왔다.
계단식 논
무덕관 후문에는 트럭 몇 대가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뒷결박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은 2~3명씩 밧줄로 연결돼 적재함에 짐짝처럼 실렸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는 박원규(1928년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형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는 열여덟 살 박석규의 눈앞은 뿌예졌다.
보도연맹원들을 실은 트럭이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현 공군사관학교 옆)에 정차한 것은 1950년 7월 초순이었다. 이때부터 군인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다뤘다. 잠시 뒤 '피의 살육전'이 시작됐다. 200명이 죽임을 당한 그곳에서 임산부 강영애만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총 8발을 맞고도 말이다.
▲ 강영애 남일면 쌍수리에서 총 8발을 맞고 살아난 강영애
ⓒ 박만순
군 장교는 병사들을 향해 "야! 앞줄부터 쏴!"라고 재촉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이들은 '드디어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탕, 탕, 탕.' 울음소리는 이내 총소리에 묻혔다. 총성과 비명이 뒤엉킨 와중에 강영애 남편 정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이렇게 같이 죽는 것도 천생연분이오. 그러니 너무 원통해하지 마시오."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죽음 직전의 상황이었지만 강영애에게 그 말은 유난히 따뜻하게 들렸다. 곧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쌍수리 다음의 죽음의 골짜기는 분터골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기 전, 청주형무소 재소자 약 300명이 이미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안터벌을 비롯한 청주 보도연맹원 약 700명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분터골은 충북 최대의 학살터로, 모두 1000명이 희생됐다.
보도연맹원들의 손은 광목천과 노끈으로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군인들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며 고함을 질렀다. 트럭 적재함에서 차례로 내려올 수도 없었던 이들은 굴러 떨어지듯 내동댕이쳐졌다. 군인들은 "이 XX들이 XX라고 지X들 하는구만"이라며 총 개머리판으로 보도연맹원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죽음의 대열은 길가에서 산골짜기로 향했다. 나지막한 산 중턱에는 계단식 논이 있었다. 맨 위의 계단식 논에 열 명의 보도연맹원이 세워졌다. "조준, 발사!"하는 소리와 함께 보도연맹원들이 집단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4일간, 7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뒤늦게 분터골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내덕동 의용경찰 장기암은 자전거를 타고 고은삼거리를 지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큰길에서 경찰에게 가로막혔다. "처형은 다 끝났고, 지금 확인사살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막내 매형을 살려 볼 요량으로 죽도록 페달을 밟았던 장기암은 허탈함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1950년 7월 9일이었다.
속리산 구경시켜 준다더니
박정순과 올케 최재덕(1927년생)은 트럭에 실린 채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파랬지만 마음속은 새카맸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흥얼거리고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태우며 군인들이 "속리산 구경시켜 준다"고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들이었다.
1950년 7월 12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 GMC 트럭 여러 대가 먼지를 흩날리며 도착했다. 트럭을 길가에 세운 군인과 경찰은 논과 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주민들에게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수백 발의 총소리가 아곡리 마을과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총소리와 함께 피울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청주 보도연맹원 약 150명이 보은 땅까지 끌려와 학살된 순간이었다.
▲ 박정순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학살당한 박정순
ⓒ 최계자
총살 직후 경찰들은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남성 청장년들을 소집해 "빨갱이들 잡아 놨으니까 장례 치러라"며 시신 수습을 강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세 곳의 학살 지점 인근에 시신을 매장했다.
여성 보도연맹원 3명은 별도로 학살됐는데, 시신 수습 과정에서 속옷 속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주민들은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충북보도연맹 사무실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미원국민학교로 이송됐다가 다시 청주형무소로 돌아온 날은 1950년 7월 5일이었다. 이들이 다시 미원을 경유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로 끌려간 것은 7월 12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쌍수리, 분터골, 아곡리에서 청주·청원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주체를 청주경찰서 경찰과 제2사단 제16연대 헌병대로 추정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보도연맹사건 보고서, 2008).
보도연맹원들이 주검으로 변해 가는 동안,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은 청주지검장의 보호 아래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으로 향하던 도중 보은군 원남면에서 충북도경국장 이시환이 술자리를 벌였고, 그 자리에는 신형식도 함께 있었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